볼티모어의 벌목공들

11월 21일 20시. 볼티모어에 온 지 석 달이 다 돼간다. 볼티모어는 칠레의 해안 도시 디차토에서 남극 방향으로 29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낫 모양의 자그마한 섬이다. 볼티모어의 면적은 2.43제곱킬로미터고 해안선 길이는 21킬로미터며 최고점은 푸에스티오 산(384미터)이다. 1년 내내 낮은 먹구름이 몰려다니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볼티모어는 프리부츠 나무로 뒤덮여 있다.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말로 볼티모어는 ‘영원히 잠든 곳’이다. 볼티모어에는 두 개의 거대한 자연이 잠들어 있다. 남극해와 프리부츠 숲이 그것이다. 바다와 숲이 부딪히는 소리가 진종일 어두운 볼티모어에 울려 퍼진다. 마푸체족은 그 소리를 잠든 아기가 쌔근거리는 것에 비유하면서 볼티모어의 잠을 깨우면 재앙이 닥친다고 굳게 믿었다.
1981년 12월, 미국과 구소련의 연구원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앞다퉈 볼티모어에 여장을 풀었다. 명목은 남극연구를 위한 전초기지였지만 그들 중 일부는 연구원으로 위장한 특수요원이었다. 볼티모어 근해에 다량의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정보가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석유를 선점하기 위한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요한 섬에 총성이 오갔고 밤마다 암살이 자행됐다. 전직 스페츠나츠 요원의 회고에 의하면 프리부츠 숲은 땅에 묻힌 연구원들의 시체에 의해 더욱 풍성해졌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볼티모어에 둥지를 틀고 있는 프리부츠에게는 우스운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국과 구소련의 난투극이 볼티모어의 잠을 방해하자 큰 해일이 몰려와 그들을 모두 프리부츠 숲에 묻어버렸다는 후일담도 전해 내려온다.
냉전 시대의 막이 내리고 자본주의의 해일이 세계를 휩쓸고 나서부터 볼티모어는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석유는커녕 그 흔한 타이타늄조차 없다는 게 밝혀진 이후 미국마저 볼티모어를 떠난 것이었다. 숲과 해안 곳곳에서 발견되는 탄피나 불발 지뢰, 연구원들이 머물렀던 가옥만이 간간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지금 그 가옥을 보수한 곳에 머물고 있다.
머리 위 차양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프리부츠 나무로 만든 딱딱한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한다. 거센 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담요를 목까지 끌어 올리고 주위를 살핀다. 프리부츠들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거실로 통하는 여닫이문. 십여 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는 벽면. 벽면에 거미처럼 달라붙은 회중시계. 차갑게 식은 구리 난로. 나는 볼티모어에 있다.

11월 24일 7시. 눈을 뜨니 간밤에 보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W. S. 아이작의 1976년 논문집 《지의류(地衣類)와 선(善)의 형태》가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다. 나도 지의류를 연구하는 식물학자다. 지의류는 다른 식물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극지나 높은 산에 주로 서식한다. 나무껍질이나 바위를 들여다보면 고름 덩어리처럼 도드라져 보이는 지의류 군집을 발견할 수 있다. 가지 끝에 달린 접시 모양의 나자기로 이슬을 받는 꼬마요정컵지의, 시체를 연상시키는 죽은 목재 위에 서식하며 붉은 자실체가 가지 끝에 얹혀 있는 영국병정지의, 툰드라지대의 현무암 바위에 붙어사는 강아지풀 모양의 만도로스……. 지의류의 종류는 남극해의 청어 떼만큼이나 많다.